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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부모의 조건

나는 부모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너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 어떻게 너에게 지금까지 잘 해주시는 부모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생각하고, 나도 내가 이기적인 쓰레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한다.

나는 엄청 어릴 때 딱히 좋은 꼴을 못 보고 자랐다. 내 동생이야 기억도 못 하겠지만 나는 기억하는 나쁜 기억이 많다. 사람이 누군가를 존경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판타지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판타지가 산산조각 난 상태였다.

나이를 먹고도 좋은 꼴을 보진 못 했다.

그런데 그러한 과거, 사람이 살면서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 가질 수 있다.

내가 그런 부분까지 트집잡진 않는다.

그럴 수 있다.

그런 쓰잘데기 없는 부분을 다 제외하고, 내가 부모에게 가장 실망하는 부분은 단 한 번도 나를 신뢰해준 적이 없다는 점이다.

사람이 고양이을 키우는 모습을 보면 자식에게 대할 모습을 미리 알 수 있다. 반대로, 나에게 대했던 모습을 기억하지 못 하더라도 고양이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부모가 내게 했던 행동과 고양이를 대할 때의 모습에 전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어차피 말을 안 듣는다.

훈육이 불가능한 동물이다.

하지만 사람은 고양이의 사소한 행동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어차피 훈육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은 받은 스트레스를 고양이에게 푸는 사람이 있다. 고양이에게 강하게 혼을 내려고 하거나 자꾸만 고양이가 뭔가 하려고 할 때마다 화를 내거나 눈치를 주고 스읍 하는 소리를 내곤 한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이고, 자기가 데려와놓고도 그런다.

결국 고양이든 자식이든 이해할 생각은 없고 그저 자신이 현재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걸 상대에게 풀어버린다. 때문에, 어릴 때 쓸데없는 걸로 혼을 난다.

어리면 당연히 눈치가 없을 수밖에 없는데 왜 폭군처럼 군림하는 아빠 앞에서 쓸데없는 행동을 해서 화나게 만드냐고 질책하고, 어리니까 숙제나 준비물을 까먹을 수도 있는데 자신은 단 한 번도 미리 챙겨주려고 한 적도 없고 물어봐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런 건 꼭 학교 가기 전에 말하느냐 질책한다.

정말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신경써준 적 없으면서 그러한 질책을 한다.

고양이가 의자나 쇼파를 긁으면 스크래처라도 많이 배치해볼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이 고양이가 의자나 쇼파를 긁으면 스읍 하고 화를 낸다. 단 한 번도 버릇된 훈육을 해보려고 시도조차 한 적 없는 사람이 맨날 꿍시렁꿍시렁대면서 화를 낸다.

나를 키울 때와 고양이를 키울 때의 차이가 없다.

그럼 안 키워야하는데, 데려오질 말았어야하는데 아무 생각없이 귀엽다고 데려와서는 자기가 당연히 해줘야할 최소한의 무언가를 해주면서 키워주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소홀할 수 있다.

거기까지도 타협해서 이해해준다.

자기도 사람이고 어떻게 다 신경을 써줄 수 있겠나. 나도 고양이를 안 키웠어야했는데 내가 키우는 고양이가 있고, 내가 키우는 고양이에게 시간을 많이 쓰고 싶지 않다. 빨리 나이가 들고 자연스럽게 어느 날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차마 내가 버리거나 남에게 주진 못 하겠어서. 그렇다보니 소홀해진다. 처음에야 많이 놀아줬지만 잠시일 뿐, 나중에는 서로 신경쓰지 않고 방치하듯이 지내게 된다. 그러니 나도 그런 부분을 왜 내가 어릴 때 해주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지도 않다. 어릴 땐 그런 부분에 대해 불만조차 가진 적이 없다. 난 잘 지냈다.

내가 정말 짜증나는 부분은 아까 말했다시피 신뢰의 부재.

신뢰를 받지 못 한다는 건 “의심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뢰를 받지 못 한다는 건, 내가 한 결정에 대해 자꾸만 들들 볶는다는 의미다. 어차피 나의 결정은 확고한데 내 결정이 아무리 확고해도 그 결정에 대해 자꾸만 들들 볶으면서 사람을 정신적으로 몰아간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스물 초반까지 일반적인 선택을 많이 하지 않았다.

부모는 내가 일반적인 루트로 살아가길 바랐던 거 같지만, 꿈도 희망도 없이 큰 미래에 대한 포부를 가지지 않고 현재만 바라보면서 열심히 사는 부모 밑에서 배운 건 꿈도 희망도 없이 현재에서 최대한 효율을 뽑는 삶이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 가졌던 꿈은 월 200 받으면서 집 한 채만 있으면 좋겠다 였고 이 꿈은 20살이 넘어서까지 유효했다. 가끔 몇몇 사람은 이러한 삶이 죽은 삶과 다를 바 없다고 종종 말하던데 걔네들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나는 적당히 죽은 채로 사는 삶을 원했다. 그래서 20살이 되자마자 취직을 하고 돈을 5년만 모으면 내가 살던 후진 아파트 가격이 대략 1억 조금 넘으니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고, 그래서 20살에 취직을 했다. 20살 뿐만 아니라 학생 때도 취직을 하기 위한 루트로 학교를 선택했고.

내가 생각한 삶의 동선은 확고했고 변경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부모는 학교를 선택했을 때부터 이미 선택했는데도 자꾸만 나의 선택을 무시하고 변경해야한다는 듯이 말을 하면서 사람을 스트레스 받게 했다. 너의 삶은 너가 선택하는 거라면서, “나는 너를 신경쓰지 않겠다”라는 말을 그렇게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 재산 한 번 나눠달라한 적 없고 기대조차 해본 적 없는 내게 “너한테 재산 안 남기고 죽을 거다(모은 재산도 무슨 10억 100억도 아니고 1억도 안 되면서). 다 사회에 환원하고 죽을 거야”따위의 말을 했으면서, 정작 내가 직접 선택한 선택지에 대해 끝까지 참견을 하면서 사람을 들들 볶아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너무 힘들 때 엉엉 울면서 선생에게 말하고 조퇴하고 집에 왔더니 괜찮냐는 말은 커녕 땡땡이나 쳤다면서 담배나 뻑뻑 피워대고, 내가 진짜 도저히 너무 우울해서 학교 한 번 빠지고 싶다고 했을 때조차 무슨 일 있냐는 걱정은 커녕 쓰레기 새끼를 보는 벌레보는 듯한 눈으로 보던 눈빛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20살도 되기 전에 취직을 했는데, 내게 정말로 진짜 시도때도 없이 지금이라도 대학을 갈 수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말을 하면서 내 선택에 응원은 커녕 사람을 들들들들들 볶아댔다. 나는 안 한다고 확고하게 표현했고 그만하라고 했는데도 사람을 끝까지 어떻게든 선택지를 바꾸기 위해 사람을 볶아댔다.

단 한 번도 네가 선택한 거니까 잘 해보라는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정작 내가 들었던 건 자기 아빠 친구 누구 알지? 걔는 어디 국립대 갔다더라. 그런데 아빠는 할 말이 없어서 쪽팔렸어. 따위의 말이었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와서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대학이라도 하면서 사람이 이미 선택한 부분들에 대해 자꾸만 어떻게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만들기 위해 사람을 자꾸만 볶아댔다. 나는 절대 바라지 않았는데 도대체 누굴 위해 저렇게 사람을 들들 볶으면서 선택지를 바꾸고 싶어하는 걸까.

나는 가끔 주변 사람들 중 잘 된 사람들을 보면 생각보다 부모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구나 싶을 때가 있다. 물론 내가 혼자 세상의 불행을 다 짊어진 듯이 말하면서 걔네가 잘 된 건 행복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다 나는 불행한 환경이어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보다보면 문득 그렇게 느끼는 부분이 없지않아 있다는 얘기일 뿐이다. 내가 그렇게까지 불행한 건 아닐 거라 생각한다. 세상엔 더 힘든 사람도 있고 더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더 슬프게 사는 사람도 있다. 단지 내가 말하는 건 부모에게 좋은 영향을 전혀 못 받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좋은 영향을 받는 사람도 있단 얘기다. 다 나처럼 학창시절을 보내진 않았던 거 같다고.

그런데 나처럼 지방(서울, 인천, 경기도는 “수도권”이다. 내가 말하는 지방은 사실 충청도 아래의 지역-경상전라-들을 말한다. 충청도도 못 끼울 건 없는데 반도체 때문에 도시 자체가 크기도하고 요샌 많이 발달해서 수도권 접근성도 높아서 제외했다)에 사는 친구의 부모는 우리 부모와 하는 행동이 유사하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에 가지 않는 선택을 한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서 사람답게 살려면 서울에 가서 좋은 직장을 찾으려 노력을 해야만 하는데, 지방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현실에서 적당히 버티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게 싫었으면 서울로 갔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적응을 못 한다는 이유로, 새로운 게 낯설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 밑에서 자식이 커봐야 나와 유사한 꼴을 당할 수밖에 없다. 부모에게 배운 마인드가 그런 마인드들 뿐인데 어떡할까. 물론, 이 중에서도 서울을 가는 선택을 하는 포부가 넘치는 이들도 있지만 나와 그들은 아니었다.

아마 고등학생 때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서, 잘 하지 못 해서이지 않을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을 관찰하면 이상하게도 지방 사는 사람만 부모에 대한 원망을 자주 표현한다.

그런데 자식은 부모에게 그런 걸 배웠는데, 정작 부모는 자식이 자신처럼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아진 삶을 살길 바라다보니 그에 대한 괴리로 항상 자식을 들들 볶게 된다.

자기가 포부를 가진 모습을 보여주고 이러한 마인드로 살아야한다는 걸 몸소 보여줬으면 하기 싫어도 따라할 텐데 자기도 못 한 걸, 자기가 이상하게 보여주고 행동해놓고 자식에겐 그렇게 하길 바라면서 사람을 들들 볶아댄다.

자식의 선택이 마음에 안 들었더라도 응원을 해줬으면 안 되는 걸까?

신뢰해줬으면 안 되는 걸까?

왜 그들은 단 한 번도 무언가 하겠다고 할 때 자기가 도와준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을까? “그거 하겠다고? 내가 알아보니까 그거 할 때 이러한 무언가로 할 수도 있대. 이게 좋아보이는데 그거 할 때 이런 방향으로 해보는 건 어때?”하고 더 나아갈 부분에 대해 고민해준 적이 왜 한 번도 없을까? 왜 평소엔 관심조차 보이지 않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을 했을 때 사람을 들들 볶아댈까? 이미 결정된 사항조차 어떻게든 자기가 원하는 길로만 가게 만들고 싶어서 사람을 볶아댈까? 그렇게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라고 버릇처럼 말하고 어른이 되면 재정적인 지원은 쌀 한 톨도 안 해주겠다는 듯이 말하던 사람들이 왜 남의 선택엔 그렇게 개입하고 싶어하는 걸까?

나는 부모를 좋아하기 어렵다.

나도 스물 때까진 그렇게 비싼 건 아니지만 내 월급 수준에서 나름 신경 쓰는 생일 선물도 챙겨주고 그랬었다. 하지만 들들 볶는 걸 자꾸만 당하니 더 이상 좋아하기도 힘들고, 내가 잘 살고 있지도 않으니 더 나쁜 방향으로만 떠올리게 된다.

신뢰 조금만 해줬으면 내가 내던 힘 계속 힘낼 수 있게 발이라도 걸지 않았으면, 뭔가 다르지 않았을까. 나를 조금만 존중해줬으면 다르지 않았을까. 나를 정말 조금만 존중해줬으면 나도 부모를 존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 부모는 나에 대한 존중을 단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그저 내가 지금 고양이를 그만 키우고 싶으면서 데리고만 있고 밥만 먹이고 공간만 마련해주고 잘 놀아주지도 않는 정도로만 키우는 정도 뿐이었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나를 관찰할 때 너를 키워주고 재워주고 너를 위해 삶의 일정 부분 이상을 쓰신 분들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 할 수 있다. 반박하지 않겠다. 내가 받은 게 많다는 말을 할 수도 있고 나를 쓰레기 새끼라도 해도 납득한다. 부정하지 않겠다. 세상에는 부모에게 받은 걸 빚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더라.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행복해야 빚이지 내가 행복하질 않은데 어떻게 그게 빚인가 싶다. 나는 내가 자는 동안 우리 집 근처에서 핵폭탄이 터지길 바라고 내가 자는 동안 나를 증오하는 누군가가 목을 졸려 살해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 한 채로 아무생각없이 잠들고 갑자기 생을 마감하고 싶다.

삶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고 나를 낳아준 부모에게 감사하다는 생각까진 들지 않는다. 차라리 처음부터 낳지 않았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르는 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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