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난다. 별 일이 없었을 때조차 화가 난다. 내가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별 일이 없다고 쓰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별 일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일이 나를 화나게 했을까? 간접적인 원인은 되었어도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매일매일 화를 나게 할 정도였을까?
아침에 일어나면 기운이 개운치 않다.
우울하면 잠을 자고 일어나면 해결된다고들 많이 말한다.
하지만 나는 최근 몇 년 간 아침에 일어나서 상쾌한 기분이었던 적이 거의 없다. 그래도 자고 일어나면 감정이 옅어지긴 했는데, 최근에는 일어났을 때도 새벽 2시의 센치한 감정을 그대로 느낀다. 다만 새벽 2시엔 우울한 방향으로 표현하지만 오전 8시엔 분노하는 방향으로 표출된다.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난다.
왜 화가 날까.
한 번 고민해봤다.
최근 화가 나는 이유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베이스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억울하다.
인생 전반적으로 억울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전부 내가 저지른 행동 때문에, 내가 앞을 보며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억울하지 않은 건 아니다.
세상에는 취미로 했던 일이 마침 코딩이었어서 공부 안 하고 놀았어도 편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게임을 잘 해서 게임 방송으로 먹고 사는 사람도 있고, 잘 생겨서 호감을 쉽게 받는 사람도 있고, 부모가 자식을 자식처럼 대해서 잘 해주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삶적인 비교를 하고자 했던 건 아니지만 얘기를 하다보니 떠오른다.
이런 걸 다 치워놓고,
내가 화가 나는 이유가 뭘까.
사랑을 못 받아서.
나도 타인에게서 감정을 충족받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온라인에서 아무리 호감을 많이 사더라도 오프라인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결국에 실망만 준다.
누군가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라도 그럴 수 있다.
4-5년 전을 기대하고 나를 만나는 사람은, 내가 그 사이 많이 망가졌다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이러한 불안은 온라인 친구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 하는 원인이 되고, 어떠한 호감을 받아도 “어차피 사라질 부질없는 호감”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원흉이 된다.
그리고 가장 문제는 그러한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보니 나를 누구도 좋아하기 어렵다 라는 가정을 아주 당연스럽게 하고, 이는 자존감을 갉아먹는 원흉이 된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네가 싫어해도 나 좋아해주는 사람 많은데? 라고 생각을 해야만 하는데,
가족도 나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거 같고(돈과 사람 사이에서 저울질을 자주 당하면 그런 감정을 계속 느끼게 된다) 오프라인 친구도 나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거 같고(인생 전반적으로 쌓인 경험,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진짜로 오프라인 친구가 없다), 온라인 친구는 좋아한다고 말을 해도 실제로 보면 실망만 할 텐데 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보니 결국엔 어디서도 근거를 붙잡을 수 없다.
그런데 딱히 “외부에서 충격을 받을 일이 없다면” 근거가 없어도 된다. 내가 외부에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굳이 네가 싫어해도 나 좋아하는 사람 많은데? 따위의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살다보면 그러한 외부 충격은 계속 생긴다.
정말로 오랜만에 친구랑 만났는데 친구가 실망하는 표정을 보였을 때, 하물며 좋아하는 감정을 어필하길래 친해졌더니 나의 모습을 보고 실망을 하게 될 때, 특히 대화를 하던 중 오래된 이야기를 하면서 기대감을 증폭시킨 경우가 그렇다. 내가 학창 시절에 찍었던 사진은 오래된 사진인데 학창 시절 사진만 보고 나에 대해 기대를 했으면(실제로는 나의 학창시절 사진으로 기대감을 주지 못 한다. 단지 예를 들고 있을 뿐이다) 실망을 주게 되니까.
하물며 고추 따위조차 그렇다. 사람이 살이 찌고 나이를 먹으면 외모도 잔뜩 바뀌는데 고추의 생김새도 바뀐다. 4-5년 전 섹스했던 친구가 예전 기억 때문에 좋아해줬는데 정작 다시 만나보니 살이 쪄서 고추도 조금 묻히고(겉보기에 길이가 짧아지고) 발기도 예전처럼 안 되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물며 거기서 더 나가 “살 쪘잖아 운동할 생각 없어?” 같은 얘길 하면 또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아 지금은 내가 구리다는 얘기구나. 물론 이는 나도 자유롭지 않다. 나도 귀여운 친구가 살이 쪘다고 하면 살을 빼줬으면 좋겠는 바람이 있고, 나이도 안 먹고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저 사람이 평범한 아저씨가 됐을 때조차 내가 좋아할 수 있을까.. 싶어서.
아마 아저씨들의 “나는 아저씨인데, 대학생인 너는 왜 나 같은 아저씨를 좋아하는 거야?”하면서 자신감 없어보이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도 위와 같은 이유지 않을까. 다른 사람은 내가 아저씨가 된 후 대학생 때처럼 대해주질 않아서, 상처까진 받지 않았어도 예전같은 외모 자신감은 잃을 수밖에 없었는데 너는 왜 내 외모가 대학생 시절인 거처럼 대해주는 거야. 왜 자꾸 좋다고 해주는 거야. 왜 자꾸 귀엽다고 그러는 거야. 나는 네가 좋아할 부분 없는데 이제. 라고 하게 되듯이 말이다.
잠시 아저씨 얘기로 빠져버렸는데,
실망주는 걸 반복하다보면 내가 가치없어진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좋아한다고 감정 어필을 잔뜩 한 사람이 나를 봤을 때 실망하면 어떤 기분일까. 두 번 정도야 상대방의 문제라고 넘길 수 있지만 현상이 자꾸만 반복되면 나에게서 문제를 찾게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꼭 외모 뿐만 아니라, 내가 “이러한 성향의 사람이라는 걸 드러내면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까”같은 불안감으로도 느낄 수 있다.
내가 남자인데 마조히스트고 성향을 여친에게 말하면 여친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내가 사실 히토미로 충간섹스 망가를 보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친한 오타쿠 친구가 나를 혐오스러워할까? 같은 고민 말이다. 아빠에게 내가 게이라고 말하면 엄마가 나를 죽이려고 들까? 호적에서 파버리려고 할까? 친했던 친구에게 사실 너를 동성애적으로 좋아하고 있었다고 말하면 나를 역겨워하면서 손절을 할까?
실망하면 어떡하지.
실망할 때의 썩은 표정을 내가 보게 되면 어떡하지.
지금까진 실망만 하던데.
그리고 이번엔 아닐 거라 믿으면서도 불안이 실제로 드러나는 순간을 맞이한다.
아 역시. 싫어하는구나. 역시 이런 모습의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은 없구나. 타인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사랑받을 노력을 해야하는데, 나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타인에게 사랑받길 원하고 있으니 당연히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지.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지.
근데 억울하다.
어떤 사람은 노력도 안 하고 사랑을 받기도 하는데 왜 나만 노력을 해야하지?
어떤 사람은 그저 공부를 재밌게 할 수 있는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서 엉덩이 10시간 붙이면서 전혀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즐겁게 공부를 하는데, 아니면 누구는 1시간만 공부해도 고득점을 하는데, 나는 왜 20시간씩 앉아서 공부를 해야하고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면서 괴로워하면서 공부를 해야하지?
왜 나는 타인에게 어필될 만한 매력이 없지?
왜 나는 노력해서 살을 빼도 좆같이 생겼지?
다이어트를 포기한 사람은 감량을 아예 안 해본 사람보다, 오히려 감량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안 하게 된다. 왜 안 하게 될까? 노력해서 살을 빼도 거지같이 생긴 얼굴은 바뀌지 않고 내 몸에 새겨진 찐따같은 성격도 바뀌지 않아 내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살을 빼면 복권을 긁을 수 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살을 빼도 못 생긴 사람은 못 생겼다. 안 빼본 사람이나 복권이니 뭐니 개같은 소릴 할 뿐이다. 조세호가 살을 뺀다고 박보검이 되는 게 아니라 살 빠진 조세호가 될 뿐이다. 살 빠진 조세호가 그렇게 외모적으로 잘생겼던가? 그게 복권이었던가? 그러한 조세호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살을 뺀다고 박보검이 되는 건 절대 아니다.
수학을 포기한 사람, 공부를 포기한 사람이라고 뭐가 다를까?
맑은 기분을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