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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나는 이유

최근에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난다. 별 일이 없었을 때조차 화가 난다. 내가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별 일이 없다고 쓰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별 일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일이 나를 화나게 했을까? 간접적인 원인은 되었어도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매일매일 화를 나게 할 정도였을까?

아침에 일어나면 기운이 개운치 않다.

우울하면 잠을 자고 일어나면 해결된다고들 많이 말한다.

하지만 나는 최근 몇 년 간 아침에 일어나서 상쾌한 기분이었던 적이 거의 없다. 그래도 자고 일어나면 감정이 옅어지긴 했는데, 최근에는 일어났을 때도 새벽 2시의 센치한 감정을 그대로 느낀다. 다만 새벽 2시엔 우울한 방향으로 표현하지만 오전 8시엔 분노하는 방향으로 표출된다.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난다.

 

왜 화가 날까.

한 번 고민해봤다.

최근 화가 나는 이유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베이스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억울하다.

인생 전반적으로 억울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전부 내가 저지른 행동 때문에, 내가 앞을 보며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억울하지 않은 건 아니다.

세상에는 취미로 했던 일이 마침 코딩이었어서 공부 안 하고 놀았어도 편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게임을 잘 해서 게임 방송으로 먹고 사는 사람도 있고, 잘 생겨서 호감을 쉽게 받는 사람도 있고, 부모가 자식을 자식처럼 대해서 잘 해주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삶적인 비교를 하고자 했던 건 아니지만 얘기를 하다보니 떠오른다.

이런 걸 다 치워놓고,

내가 화가 나는 이유가 뭘까.

 

사랑을 못 받아서.

나도 타인에게서 감정을 충족받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온라인에서 아무리 호감을 많이 사더라도 오프라인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결국에 실망만 준다.

누군가는 아닐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라도 그럴 수 있다.

4-5년 전을 기대하고 나를 만나는 사람은, 내가 그 사이 많이 망가졌다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이러한 불안은 온라인 친구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 하는 원인이 되고, 어떠한 호감을 받아도 “어차피 사라질 부질없는 호감”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원흉이 된다.

그리고 가장 문제는 그러한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보니 나를 누구도 좋아하기 어렵다 라는 가정을 아주 당연스럽게 하고, 이는 자존감을 갉아먹는 원흉이 된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네가 싫어해도 나 좋아해주는 사람 많은데? 라고 생각을 해야만 하는데,

가족도 나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거 같고(돈과 사람 사이에서 저울질을 자주 당하면 그런 감정을 계속 느끼게 된다) 오프라인 친구도 나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거 같고(인생 전반적으로 쌓인 경험,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진짜로 오프라인 친구가 없다), 온라인 친구는 좋아한다고 말을 해도 실제로 보면 실망만 할 텐데 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보니 결국엔 어디서도 근거를 붙잡을 수 없다.

그런데 딱히 “외부에서 충격을 받을 일이 없다면” 근거가 없어도 된다. 내가 외부에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굳이 네가 싫어해도 나 좋아하는 사람 많은데? 따위의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살다보면 그러한 외부 충격은 계속 생긴다.

정말로 오랜만에 친구랑 만났는데 친구가 실망하는 표정을 보였을 때, 하물며 좋아하는 감정을 어필하길래 친해졌더니 나의 모습을 보고 실망을 하게 될 때, 특히 대화를 하던 중 오래된 이야기를 하면서 기대감을 증폭시킨 경우가 그렇다. 내가 학창 시절에 찍었던 사진은 오래된 사진인데 학창 시절 사진만 보고 나에 대해 기대를 했으면(실제로는 나의 학창시절 사진으로 기대감을 주지 못 한다. 단지 예를 들고 있을 뿐이다) 실망을 주게 되니까.

하물며 고추 따위조차 그렇다. 사람이 살이 찌고 나이를 먹으면 외모도 잔뜩 바뀌는데 고추의 생김새도 바뀐다. 4-5년 전 섹스했던 친구가 예전 기억 때문에 좋아해줬는데 정작 다시 만나보니 살이 쪄서 고추도 조금 묻히고(겉보기에 길이가 짧아지고) 발기도 예전처럼 안 되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물며 거기서 더 나가 “살 쪘잖아 운동할 생각 없어?” 같은 얘길 하면 또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아 지금은 내가 구리다는 얘기구나. 물론 이는 나도 자유롭지 않다. 나도 귀여운 친구가 살이 쪘다고 하면 살을 빼줬으면 좋겠는 바람이 있고, 나이도 안 먹고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저 사람이 평범한 아저씨가 됐을 때조차 내가 좋아할 수 있을까.. 싶어서.

아마 아저씨들의 “나는 아저씨인데, 대학생인 너는 왜 나 같은 아저씨를 좋아하는 거야?”하면서 자신감 없어보이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도 위와 같은 이유지 않을까. 다른 사람은 내가 아저씨가 된 후 대학생 때처럼 대해주질 않아서, 상처까진 받지 않았어도 예전같은 외모 자신감은 잃을 수밖에 없었는데 너는 왜 내 외모가 대학생 시절인 거처럼 대해주는 거야. 왜 자꾸 좋다고 해주는 거야. 왜 자꾸 귀엽다고 그러는 거야. 나는 네가 좋아할 부분 없는데 이제. 라고 하게 되듯이 말이다.

잠시 아저씨 얘기로 빠져버렸는데,

실망주는 걸 반복하다보면 내가 가치없어진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좋아한다고 감정 어필을 잔뜩 한 사람이 나를 봤을 때 실망하면 어떤 기분일까. 두 번 정도야 상대방의 문제라고 넘길 수 있지만 현상이 자꾸만 반복되면 나에게서 문제를 찾게 될 수밖에 없다.

이는 꼭 외모 뿐만 아니라, 내가 “이러한 성향의 사람이라는 걸 드러내면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까”같은 불안감으로도 느낄 수 있다.

내가 남자인데 마조히스트고 성향을 여친에게 말하면 여친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내가 사실 히토미로 충간섹스 망가를 보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친한 오타쿠 친구가 나를 혐오스러워할까? 같은 고민 말이다. 아빠에게 내가 게이라고 말하면 엄마가 나를 죽이려고 들까? 호적에서 파버리려고 할까? 친했던 친구에게 사실 너를 동성애적으로 좋아하고 있었다고 말하면 나를 역겨워하면서 손절을 할까?

실망하면 어떡하지.

실망할 때의 썩은 표정을 내가 보게 되면 어떡하지.

지금까진 실망만 하던데.

그리고 이번엔 아닐 거라 믿으면서도 불안이 실제로 드러나는 순간을 맞이한다.

아 역시. 싫어하는구나. 역시 이런 모습의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은 없구나. 타인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사랑받을 노력을 해야하는데, 나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타인에게 사랑받길 원하고 있으니 당연히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지.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지.

근데 억울하다.

어떤 사람은 노력도 안 하고 사랑을 받기도 하는데 왜 나만 노력을 해야하지?

어떤 사람은 그저 공부를 재밌게 할 수 있는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자라서 엉덩이 10시간 붙이면서 전혀 괴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즐겁게 공부를 하는데, 아니면 누구는 1시간만 공부해도 고득점을 하는데, 나는 왜 20시간씩 앉아서 공부를 해야하고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면서 괴로워하면서 공부를 해야하지?

왜 나는 타인에게 어필될 만한 매력이 없지?

왜 나는 노력해서 살을 빼도 좆같이 생겼지?

다이어트를 포기한 사람은 감량을 아예 안 해본 사람보다, 오히려 감량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안 하게 된다. 왜 안 하게 될까? 노력해서 살을 빼도 거지같이 생긴 얼굴은 바뀌지 않고 내 몸에 새겨진 찐따같은 성격도 바뀌지 않아 내 삶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살을 빼면 복권을 긁을 수 있다는 듯이 말하지만 살을 빼도 못 생긴 사람은 못 생겼다. 안 빼본 사람이나 복권이니 뭐니 개같은 소릴 할 뿐이다. 조세호가 살을 뺀다고 박보검이 되는 게 아니라 살 빠진 조세호가 될 뿐이다. 살 빠진 조세호가 그렇게 외모적으로 잘생겼던가? 그게 복권이었던가? 그러한 조세호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살을 뺀다고 박보검이 되는 건 절대 아니다.

수학을 포기한 사람, 공부를 포기한 사람이라고 뭐가 다를까?

 

맑은 기분을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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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를 하는 이유

나는 자해를 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왜 자해를 할까?

중2병 걸려서 팔목에 칼로 살살 모양 내면서 그림을 그리는 정도는 호기심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릴 적에 호기심으로 한 번 살살 문신 그리듯이 그려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 긋는 게 아니라 달고나 모양내듯이 살살 하다보면 모양새만 살짝 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오래 안 가고 금새 사라진다. 껍질만 살짝 벗긴 수준이니까 종이에 베인 거랑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아예 손목을 긋는 자해는 날로 세게 긁는 행위고 피가 엄청 많이 나는 행위다. 아프기 때문에 장난이나 호기심으로 할 이유가 없다. 허세나 중2병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은 절대 아니다. 정말로 자기 자신을 아프게 해야할 만한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

나는 자해를 하고싶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으니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자해를 할까.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틀릴 수도 있다. 단지 내가 오늘 느낀 감정에 대해서 말하는 거니까, 틀릴 수 있다 분명. 염두해두고 읽어주길 바란다.

내 최근 글을 많이 본 사람이야 알겠지만 나는 최근 정말로 상태가 좋지 않다. 살면서 정신과를 가볼까 고민한 적이 별로 없는데 몇 주 전부터 멘탈 상태가 좋지 않아 정신과라도 가봐야하는 걸까 고민하고 있다. 너무 우울하고 지친다.

사소하다면 정말 사소한 일들인데 내 멘탈을 너무 많이 갉아먹는다.

여하튼 최근에 지쳐있고 몰려있는 상태인데, 이러한 환경에서도 나의 멘탈을 강하게 긁는 사람을 만나게 될 수가 있다. 이게 살다보면 별 거 아닌 일인데 정말 기분 나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그게 나와 크게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어렵고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오히려 더 나쁘게 돌아올 수도 있는 종류의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부모나 직장상사, 선생, 학교 친구, 군대 선임 같은 사람들.

그런데 이게 상대에게 있는 그대로 다 질러버리고 좆까 씨발아 라고 할 수 있으면 괜찮은데, 지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당연히 위에 언급한 직장상사, 군대 선임 같은 사람들에게 지르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그럼 밖으로 뱉아야 할 말이 내 속에서 맴돌게 되는데, 속으로 들어온 걸 어떻게든 풀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을 희생양 삼아 갈구면서 분출하던지 어떤 방법으로라도 내가 화를 풀 수 있어야만 한다. 트위터에 개씨발인생좆같다존나씨발개새끼들존나씹 이런 의미없는 욕을 주구장창 써도 좋고 블로그에 써도 좋고 아니면 갈대밭 가서 땅 파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해도 좋고 뭐든 좋다. 분이 풀리기만 하면 된다. 롤을 할 때 트롤한테 참지 말고 개씨발애미창년새끼야 말하는 일이나 아니면 내가 매일 디스하는 행동이지만 키보드 내려치는 샷건이라도 쳐서 분풀이를 어떻게든 하면 자기 속은 풀리게 된다.

그런데 이 모든 걸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내가 당장 모니터를 부수고 싶지만 모니터는 비싸고 다시 사기엔 돈 아까워 못 한다. 뭐라도 부수고 싶은데 돈 아까워서 못 하고 어디 가서 패악질이라도 부리고 싶은데 부릴 사람도 없다. 당사자한테 개지랄을 하자니 개지랄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술이라도 마실려니 건강 상태가 안 좋고 뭘 생각해도 할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밖에 나가서 뛰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하는 건전한 행동은 별로 안 풀릴 거 같고, 누군가에게 찡찡대고 싶은데 내가 평소 했던 말이 있는데 남에게 찡찡댈 수도 없고 해봐야 민폐일 뿐이고 트위터에 쓰자니 요새는 트위터에 그런 거 안 쓰는 게 맞다 생각해서 진짜 진심으로 강하게 쓰는 건 못 하고, 블로그에도 요새는 있는 생각 그대로 다 뱉어내는 게 아니다 보니까 남에게 보일 걸 생각하고 쓰다 보니 못 한다. 지금처럼 이렇게 정제해서 말하는 거 밖에 못 한다.

그럼 남은 건 단 하나다.

나 자신.

주전자가 열을 받으면 물은 증기로 바뀐다. 쌓이는 증기를 분출할 구멍이 필요한데, 주전자에 구멍이 없다고 생각해봐라. 밥솥인데 증기구멍이 없는 밥솥이다. 구멍이 없다보니 증기는 계속 쌓이고 폭발 직전의 상태가 되어버린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든 증기를 빼야하는데 증기를 뺄 방법이 없으니 결국 주전자는 열을 더 받다 결국 터진다.

주전자가 폭발하게 되듯이 결국 자해를 하게 된다. 자기 자신의 팔을 날붙이로 강하게 그어버릴 수도 있다. 너무 화나니까 뭔가 어떻게든 풀긴 풀어야하니까 그런데 주변에 날붙이와 자기 신체가 보인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저질러버릴 수 있다.

물론 나는 자해를 하지 않았다. 아프니까.. 단지 한 번 충동적으로 떠오르기만 했을 뿐이다. 너무 귀여운 사람을 보면 강간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듯이. 대부분의 사람은 강간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강간을 실행하진 않는다. 이성으로 버티다보면 충동적인 감정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다시 내려간다.

하지만 평소에 정말로 분출할 장소가 없고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는, 일상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만성적으로 우울한 사람이라면 자기 팔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자해의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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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부모의 조건

나는 부모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 너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 어떻게 너에게 지금까지 잘 해주시는 부모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생각하고, 나도 내가 이기적인 쓰레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한다.

나는 엄청 어릴 때 딱히 좋은 꼴을 못 보고 자랐다. 내 동생이야 기억도 못 하겠지만 나는 기억하는 나쁜 기억이 많다. 사람이 누군가를 존경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판타지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판타지가 산산조각 난 상태였다.

나이를 먹고도 좋은 꼴을 보진 못 했다.

그런데 그러한 과거, 사람이 살면서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 가질 수 있다.

내가 그런 부분까지 트집잡진 않는다.

그럴 수 있다.

그런 쓰잘데기 없는 부분을 다 제외하고, 내가 부모에게 가장 실망하는 부분은 단 한 번도 나를 신뢰해준 적이 없다는 점이다.

사람이 고양이을 키우는 모습을 보면 자식에게 대할 모습을 미리 알 수 있다. 반대로, 나에게 대했던 모습을 기억하지 못 하더라도 고양이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부모가 내게 했던 행동과 고양이를 대할 때의 모습에 전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어차피 말을 안 듣는다.

훈육이 불가능한 동물이다.

하지만 사람은 고양이의 사소한 행동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어차피 훈육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은 받은 스트레스를 고양이에게 푸는 사람이 있다. 고양이에게 강하게 혼을 내려고 하거나 자꾸만 고양이가 뭔가 하려고 할 때마다 화를 내거나 눈치를 주고 스읍 하는 소리를 내곤 한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이고, 자기가 데려와놓고도 그런다.

결국 고양이든 자식이든 이해할 생각은 없고 그저 자신이 현재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걸 상대에게 풀어버린다. 때문에, 어릴 때 쓸데없는 걸로 혼을 난다.

어리면 당연히 눈치가 없을 수밖에 없는데 왜 폭군처럼 군림하는 아빠 앞에서 쓸데없는 행동을 해서 화나게 만드냐고 질책하고, 어리니까 숙제나 준비물을 까먹을 수도 있는데 자신은 단 한 번도 미리 챙겨주려고 한 적도 없고 물어봐준 적도 없으면서 왜 이런 건 꼭 학교 가기 전에 말하느냐 질책한다.

정말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신경써준 적 없으면서 그러한 질책을 한다.

고양이가 의자나 쇼파를 긁으면 스크래처라도 많이 배치해볼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이 고양이가 의자나 쇼파를 긁으면 스읍 하고 화를 낸다. 단 한 번도 버릇된 훈육을 해보려고 시도조차 한 적 없는 사람이 맨날 꿍시렁꿍시렁대면서 화를 낸다.

나를 키울 때와 고양이를 키울 때의 차이가 없다.

그럼 안 키워야하는데, 데려오질 말았어야하는데 아무 생각없이 귀엽다고 데려와서는 자기가 당연히 해줘야할 최소한의 무언가를 해주면서 키워주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런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소홀할 수 있다.

거기까지도 타협해서 이해해준다.

자기도 사람이고 어떻게 다 신경을 써줄 수 있겠나. 나도 고양이를 안 키웠어야했는데 내가 키우는 고양이가 있고, 내가 키우는 고양이에게 시간을 많이 쓰고 싶지 않다. 빨리 나이가 들고 자연스럽게 어느 날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차마 내가 버리거나 남에게 주진 못 하겠어서. 그렇다보니 소홀해진다. 처음에야 많이 놀아줬지만 잠시일 뿐, 나중에는 서로 신경쓰지 않고 방치하듯이 지내게 된다. 그러니 나도 그런 부분을 왜 내가 어릴 때 해주지 않았냐고 따지고 싶지도 않다. 어릴 땐 그런 부분에 대해 불만조차 가진 적이 없다. 난 잘 지냈다.

내가 정말 짜증나는 부분은 아까 말했다시피 신뢰의 부재.

신뢰를 받지 못 한다는 건 “의심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신뢰를 받지 못 한다는 건, 내가 한 결정에 대해 자꾸만 들들 볶는다는 의미다. 어차피 나의 결정은 확고한데 내 결정이 아무리 확고해도 그 결정에 대해 자꾸만 들들 볶으면서 사람을 정신적으로 몰아간다.

나는 학창시절부터 스물 초반까지 일반적인 선택을 많이 하지 않았다.

부모는 내가 일반적인 루트로 살아가길 바랐던 거 같지만, 꿈도 희망도 없이 큰 미래에 대한 포부를 가지지 않고 현재만 바라보면서 열심히 사는 부모 밑에서 배운 건 꿈도 희망도 없이 현재에서 최대한 효율을 뽑는 삶이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 가졌던 꿈은 월 200 받으면서 집 한 채만 있으면 좋겠다 였고 이 꿈은 20살이 넘어서까지 유효했다. 가끔 몇몇 사람은 이러한 삶이 죽은 삶과 다를 바 없다고 종종 말하던데 걔네들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나는 적당히 죽은 채로 사는 삶을 원했다. 그래서 20살이 되자마자 취직을 하고 돈을 5년만 모으면 내가 살던 후진 아파트 가격이 대략 1억 조금 넘으니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고, 그래서 20살에 취직을 했다. 20살 뿐만 아니라 학생 때도 취직을 하기 위한 루트로 학교를 선택했고.

내가 생각한 삶의 동선은 확고했고 변경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부모는 학교를 선택했을 때부터 이미 선택했는데도 자꾸만 나의 선택을 무시하고 변경해야한다는 듯이 말을 하면서 사람을 스트레스 받게 했다. 너의 삶은 너가 선택하는 거라면서, “나는 너를 신경쓰지 않겠다”라는 말을 그렇게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 재산 한 번 나눠달라한 적 없고 기대조차 해본 적 없는 내게 “너한테 재산 안 남기고 죽을 거다(모은 재산도 무슨 10억 100억도 아니고 1억도 안 되면서). 다 사회에 환원하고 죽을 거야”따위의 말을 했으면서, 정작 내가 직접 선택한 선택지에 대해 끝까지 참견을 하면서 사람을 들들 볶아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너무 힘들 때 엉엉 울면서 선생에게 말하고 조퇴하고 집에 왔더니 괜찮냐는 말은 커녕 땡땡이나 쳤다면서 담배나 뻑뻑 피워대고, 내가 진짜 도저히 너무 우울해서 학교 한 번 빠지고 싶다고 했을 때조차 무슨 일 있냐는 걱정은 커녕 쓰레기 새끼를 보는 벌레보는 듯한 눈으로 보던 눈빛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20살도 되기 전에 취직을 했는데, 내게 정말로 진짜 시도때도 없이 지금이라도 대학을 갈 수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말을 하면서 내 선택에 응원은 커녕 사람을 들들들들들 볶아댔다. 나는 안 한다고 확고하게 표현했고 그만하라고 했는데도 사람을 끝까지 어떻게든 선택지를 바꾸기 위해 사람을 볶아댔다.

단 한 번도 네가 선택한 거니까 잘 해보라는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정작 내가 들었던 건 자기 아빠 친구 누구 알지? 걔는 어디 국립대 갔다더라. 그런데 아빠는 할 말이 없어서 쪽팔렸어. 따위의 말이었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와서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대학이라도 하면서 사람이 이미 선택한 부분들에 대해 자꾸만 어떻게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만들기 위해 사람을 자꾸만 볶아댔다. 나는 절대 바라지 않았는데 도대체 누굴 위해 저렇게 사람을 들들 볶으면서 선택지를 바꾸고 싶어하는 걸까.

나는 가끔 주변 사람들 중 잘 된 사람들을 보면 생각보다 부모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구나 싶을 때가 있다. 물론 내가 혼자 세상의 불행을 다 짊어진 듯이 말하면서 걔네가 잘 된 건 행복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그런 거다 나는 불행한 환경이어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고, 그냥 보다보면 문득 그렇게 느끼는 부분이 없지않아 있다는 얘기일 뿐이다. 내가 그렇게까지 불행한 건 아닐 거라 생각한다. 세상엔 더 힘든 사람도 있고 더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더 슬프게 사는 사람도 있다. 단지 내가 말하는 건 부모에게 좋은 영향을 전혀 못 받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좋은 영향을 받는 사람도 있단 얘기다. 다 나처럼 학창시절을 보내진 않았던 거 같다고.

그런데 나처럼 지방(서울, 인천, 경기도는 “수도권”이다. 내가 말하는 지방은 사실 충청도 아래의 지역-경상전라-들을 말한다. 충청도도 못 끼울 건 없는데 반도체 때문에 도시 자체가 크기도하고 요샌 많이 발달해서 수도권 접근성도 높아서 제외했다)에 사는 친구의 부모는 우리 부모와 하는 행동이 유사하다.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에 가지 않는 선택을 한 “인생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서 사람답게 살려면 서울에 가서 좋은 직장을 찾으려 노력을 해야만 하는데, 지방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현실에서 적당히 버티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게 싫었으면 서울로 갔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적응을 못 한다는 이유로, 새로운 게 낯설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 밑에서 자식이 커봐야 나와 유사한 꼴을 당할 수밖에 없다. 부모에게 배운 마인드가 그런 마인드들 뿐인데 어떡할까. 물론, 이 중에서도 서울을 가는 선택을 하는 포부가 넘치는 이들도 있지만 나와 그들은 아니었다.

아마 고등학생 때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아서, 잘 하지 못 해서이지 않을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래서인지 주변 사람을 관찰하면 이상하게도 지방 사는 사람만 부모에 대한 원망을 자주 표현한다.

그런데 자식은 부모에게 그런 걸 배웠는데, 정작 부모는 자식이 자신처럼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 조금이라도 나아진 삶을 살길 바라다보니 그에 대한 괴리로 항상 자식을 들들 볶게 된다.

자기가 포부를 가진 모습을 보여주고 이러한 마인드로 살아야한다는 걸 몸소 보여줬으면 하기 싫어도 따라할 텐데 자기도 못 한 걸, 자기가 이상하게 보여주고 행동해놓고 자식에겐 그렇게 하길 바라면서 사람을 들들 볶아댄다.

자식의 선택이 마음에 안 들었더라도 응원을 해줬으면 안 되는 걸까?

신뢰해줬으면 안 되는 걸까?

왜 그들은 단 한 번도 무언가 하겠다고 할 때 자기가 도와준다는 말을 해준 적이 없을까? “그거 하겠다고? 내가 알아보니까 그거 할 때 이러한 무언가로 할 수도 있대. 이게 좋아보이는데 그거 할 때 이런 방향으로 해보는 건 어때?”하고 더 나아갈 부분에 대해 고민해준 적이 왜 한 번도 없을까? 왜 평소엔 관심조차 보이지 않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선택을 했을 때 사람을 들들 볶아댈까? 이미 결정된 사항조차 어떻게든 자기가 원하는 길로만 가게 만들고 싶어서 사람을 볶아댈까? 그렇게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라고 버릇처럼 말하고 어른이 되면 재정적인 지원은 쌀 한 톨도 안 해주겠다는 듯이 말하던 사람들이 왜 남의 선택엔 그렇게 개입하고 싶어하는 걸까?

나는 부모를 좋아하기 어렵다.

나도 스물 때까진 그렇게 비싼 건 아니지만 내 월급 수준에서 나름 신경 쓰는 생일 선물도 챙겨주고 그랬었다. 하지만 들들 볶는 걸 자꾸만 당하니 더 이상 좋아하기도 힘들고, 내가 잘 살고 있지도 않으니 더 나쁜 방향으로만 떠올리게 된다.

신뢰 조금만 해줬으면 내가 내던 힘 계속 힘낼 수 있게 발이라도 걸지 않았으면, 뭔가 다르지 않았을까. 나를 조금만 존중해줬으면 다르지 않았을까. 나를 정말 조금만 존중해줬으면 나도 부모를 존중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 부모는 나에 대한 존중을 단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그저 내가 지금 고양이를 그만 키우고 싶으면서 데리고만 있고 밥만 먹이고 공간만 마련해주고 잘 놀아주지도 않는 정도로만 키우는 정도 뿐이었다고 생각을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나를 관찰할 때 너를 키워주고 재워주고 너를 위해 삶의 일정 부분 이상을 쓰신 분들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 할 수 있다. 반박하지 않겠다. 내가 받은 게 많다는 말을 할 수도 있고 나를 쓰레기 새끼라도 해도 납득한다. 부정하지 않겠다. 세상에는 부모에게 받은 걸 빚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더라.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행복해야 빚이지 내가 행복하질 않은데 어떻게 그게 빚인가 싶다. 나는 내가 자는 동안 우리 집 근처에서 핵폭탄이 터지길 바라고 내가 자는 동안 나를 증오하는 누군가가 목을 졸려 살해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 한 채로 아무생각없이 잠들고 갑자기 생을 마감하고 싶다.

삶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고 나를 낳아준 부모에게 감사하다는 생각까진 들지 않는다. 차라리 처음부터 낳지 않았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르는 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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