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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호

상상

나는 코로나19 백신에 대해 약간의 의심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내 나름의 이유는, 기존 신약개발 업체에서 3상을 통과하기까지 10년씩도 걸리고 10년 동안 노력해서도 안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백신 개발이 어렵기 때문이다. 글로벌 대유행으로 인해 전세계에서 치료제 개발을 해야겠다고 아무리 많은 제약사들이 덤벼들었다고 해도 기존의 그 경험과 근간을 그렇게 쉽게 흔들 정도로 ‘쉬운’ 일이었냐는 게 내 의심의 원인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안 되던 걸 한 번에 했다고?” 그리고 개발하기 위해 많은 부분에 대해 편의를 봐줬다는 부분도 미심쩍은 이유고.

우리는 평소에 이러한 의심을 많이 한다. 피아노를 10번 쳐오라고 그랬는데 너무 빨리 다 했다고 하거나, 건설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거나. 이럴 경우 우리는 합리적으로 무언가 안 하거나 뺀 게 아니냐고 의심을 한다.

이런 당연한 의심 작용으로 내가 아는 선에서 의심을 한 거 뿐이다.

그게 옳다 옳지 않다 이전에, 왜 그렇게 빨리 되었느냐 라는 그 자체가 그리고 신약 개발을 위해 각국에서 엄청나게 밀어주었다는 점 등을 생각했을 때 혹여나 약을 만들기 위해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의심 때문이다. 그게 진짜 틀려서라고 믿어서도 아니고 단지 올바른 검증이었을까? 하는 의심 때문이다.

약이 틀리고 안 틀리고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도 그래서 코로나 백신을 맞는다면 2-3년이 지난 뒤에 맞고 싶다고 그런 거고. ‘안 맞고 싶다’가 아니라 ‘2-3년 뒤에’ 맞고 싶다고 그랬다. 왜냐면 그 때는 많은 사람들 대상으로, 백신을 먼저 맞은 사람들 대상으로 검증이 되었으니까 내가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 그 때 그 검증이 옳은 거였구나, 하고 그냥 내 의심일 뿐이었네 하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할 때 가장 불쾌한 건, 이걸 듣는 사람이 자꾸만 ‘상상’을 한다는 점이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보통 어떤 상상을 하냐면 이민결이라는 사람은 의학도 믿지 않고 약도 믿지 않고 신문의 불안 조장에 음모론에 속아넘어간 병신이며 과학도 불신하며 세상 모든 걸 불신하는 사이비와 다를 바 없는 다단계에나 속아넘어갈 법한 수준 낮은 사람이다 라고 상상한다. 저대로 생각하진 않겠지만 방금 언급한 수많은 부분 중 하나 이상은 있을 거다.

나는 안티 백신을 주장하지 않았다. 단지 ‘코로나19의 치료제’에 대해서만 의심을 했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들으면 ‘그걸 안 믿으면 뭘 믿을 수 있는데요?’라는 말이 돌아온다. 나는 의학이나 과학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없다. 안티 백신을 주장한 적도 없으며 나도 평범한 약이든 백신이든 잘 맞는다.

단지 코로나 바이러스는 백신을 만드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라는 기존에 퍼져있던 정보, 그리고 임상 3상까지는 10년도 걸리는데 1년 만에 모든 걸 끝내버렸고 그 과정에 편의를 많이 봐줬다 라는 점 때문에 코로나19 치료제에 대한 의심이 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내가 의심하는 부분만 제대로 설명해주면 언제든지 나도 의심을 거둘 수 있다. 그걸 설명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그냥 맞다는 말만 반복하고 맞다고 하는 사람들도 왜 맞는지 전혀 모른다. 거의 독도는 우리땅이지만 근거는 댈 수 없다 급이다. 독도는 우리땅이라고 주장하고 싶으면 일본 주장의 근거도 알고 그에 대한 반박도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저 독도가 우리땅이라고 한다고 우리땅이 되는 게 아니다)

내가 코로나19 치료제에 대한 의심이 있는 사람이구나! 라고 하면 나는 아무 말도 안 한다. 그게 조금 모자라보여도 내가 의심이 있는 건 사실이고 그 사실까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내가 한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이상을 바라본다. 아까 위에 언급한 그런 내용들 말이다.

그게 싫은 거다.

 

사람이 어떠한 행동, 어떠한 말을 했을 때 완전하게 전해지지 않는 이유는 과대해석 때문이다. 이는 고양이(를 비롯한 애완동물)를 키울 때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행동인데, 고양이가 매일 쫓아다니고 화장실 앞에서 대기하고 집에 오자마자 애옹애옹 하고 울면서 반겨주면 이는 분리불안을 의심해봐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샤워하고 있을 때 욕실 앞에 고양이가 가만히 대기하고 있으면 ‘고양이가 보초도 서네’같은 식으로 ‘상상’하면서 받아들인다. 내가 고양이 갤러리 같은 곳에 실망하고 안 가는 이유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한 식으로 글을 작성한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상에 기반한 글들.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내가 한 말 까지만 받아들이는 거다.

 

여러분도 어떠한 행동을 했을 때 누군가가 과대해석을 하면 당황해한다. 예를 들면 그냥 별 생각없이 “그래”라고 보냈는데 상대가 딱딱하게 말했다고 혹시 나를 싫어하는 걸까? 불쾌하게 여기는 걸까? 생각하면서 “저 싫어하세요?”라고 물으면 당혹스러워한다. 이런 게 ‘상상’이다. 상대는 그저 그래 라고 보냈을 뿐인데 그래 라는 그 한 마디로 온갖 추측과 상상을 한 뒤 그런 말을 하니까.

그리고 여러분도 그런 자존감이 낮은 친구와 대화하면 너무 피곤하고 자기 말이 자기 말 그대로 안 보이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한다. 좋아한다고 말해도 이런저런 상상을 한 뒤 잘못한 게 있어 좋아한다고 말하는 줄 알고, 자기 기분 맞춰주려고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믿고. 내 말이 내가 말한 의도대로 전해지지 않을 때, 그런 게 우리는 일상적으로 너무나 많다.

나는 단지 그런 게 싫을 뿐이다. 물론, 나라고 타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냐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도 그렇고 많은 사람이 그렇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같은 언어를 쓰고 있어도 언어는 한계를 가진다. 결국 타인에게 내 의도대로 말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싫고 허탈하고 짜증나기도 하고 그런 걸 벗어나지 못 하니 답답하고 그런 거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단지 그런 얘기였을 뿐이다.

 

애초에 내가 이렇게 글자를 많이 사용해서 내가 지금 한 생각을 온전히 전하려고 애를 썼어도 결국 내 의도는 전해지지 않고 위의 글에서 찾을 수 있는 여러 요소를 가지고 재해석하고 내가 의도하지 않은 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수도 있다.

그저 독일 제복이나 독일 탱크와 같은 부분을 매력적이라고 여겨 세계 2차 대전 당시를 주제로 영화를 만든 감독이 있다해도, 정작 영화의 퀄리티가 올라갈수록 관객은 잔혹한 사실만 두 눈으로 느끼게 되면서 세계 2차 대전의 독일을 욕하듯이 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는 걸까.

 

내 말이 내 의도대로 내 생각대로 내가 바란대로 전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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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종류

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의 종류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평론가가 좋아할 만한 ‘할 말이 많은’ 작품, 하나는 할 말이 없는 작품. 평론가는 글쟁이고 자신이 감상하는 컨텐츠에서 할 말이 많아야 자신의 장기를 잔뜩 드러낼 수 있다. 글빨로 상대를 압살하려면, 글의 길이를 늘리려면 자신이 언급할 장면이 많아야하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폭넓은 감상을 하는 사람이 있긴 하고, 평론가는 자신이 취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장기가 있긴 하다.

하지만 그래봐야 글쟁이다.

그런데 글쟁이가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요소가 없을 때도 밥벌이를 하려고 글을 쓰다 보면, 할 말이 없는 작품에선 말을 ‘지어내게’ 된다. 이런 감상은 대부분 엄청나게 구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는 그런 감상을 써내게 된다.

대개 평론가의 좋은 비평을 보고 싶으면 기생충처럼 할 말이 많아보이는 작품의 비평을 보면 된다. 기생충이 생각보다 할 말 많은 작품이긴 하다(생각보다 할 말이 많길래 내 평가 2.5점 준 거에서 3점대로 올려줄까 고민 중). 반대로 구린 비평을 보고 싶으면 수상한 그녀와 같은 재미 위주로만 쓰인 작품의 비평을 보면 된다.

애초에 이런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짙은 영화는 평론가에게 인기가 없다. 할 말이 없다보니(자신이 느낀 부분이 적다보니) 좋은 글을 쓰기가 힘들고, 고작 이러이러한 신파에서 감동했다와 다를 바 없는 감상을 쓸 순 없으니 작품 평가 하듯이 글을 써야하고 결국엔 할 말이 없어 까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니까.

 

비평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비평이라는 틀 안에 들려면 작품 내에서 느낄 수 있는(장치된 게 아니라 자의적으로 해석) 요소를 잡아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아야만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그냥 내 기준이니 공감하지 않아도 된다.

잘 만든 영화는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그런데 모든 작품에서 할 말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평론가는 어떠한 영화에 대한 칼럼을 써야만 하고, 결국 자신의 칼럼 밥벌이가 비평으로서의 퀄리티를 떨어뜨린다. 일반 감상을 쓸 수 없으니 결국 그런 걸 가지지 못 한 작품을 구리다고 깔 수밖에 없다.

 

‘너의 이름은’이 기존의 신카이 마코토 팬들 중 부정적으로 본 사람도 있었다. 이는 기존의 예술영화 느낌을 벗고 엔터테인먼트적인 영화로 완전히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감상을 할 때 작품의 종류는 두 가지다.

엔터테인먼트 영화와 예술 영화.
(내가 표현의 편의를 위해 ‘예술 영화’라고 했는데 평소에 내가 말한 예술의 정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이런 식으로 예술 영화라고 떠받들어주는 걸 안 좋아하는 걸 알 거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그저 거기 있는 거고, 그 밑에 여러 범주(웹소설조차 포함되는)가 있는 거다. 내가 지금 말한 표현은 문학에서 장르문학과 순문학을 구분하듯이 편의적으로 사용한 거니 예술 영화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줬음 좋겠다. 평소에도 비상업적 영화를 예술 영화라고 표현한다)

다만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상업영화라는 틀 내에서는 이 둘을 적당히 섞는다. 예를 들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 같은 영화는 상업 영화고 철저히 엔터테인먼트 영화지만 예술 영화적인 느낌을 섞는다. 이런 작품이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영화다.

그런데 이걸 가능케하는 감독은 그렇게 많지 않다. 너무 엔터테인먼트를 쫓거나 너무 예술을 쫓거나 둘 중에 하나다. 신과 함께가 신파라고 욕 먹었던 이유는 진짜로 신파라서가 아니다. 신과 함께가 웹툰 소재의 엔터테인먼트 영화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할 말이 없는 작품은 비평적인 감상만 하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한다.

그러한 ‘무언가를 느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자신이 보는 눈도 없으면서 그런 게 없다면 그저 디스를 하기 때문에 ‘신과 함께’가 까인다고 봐야한다.

 

많은 사람은 착각을 한다. “가문의 영광 같은 영화가 기생충보다 잘 만든 영화라는 거냐?”, “막장 드라마 왔다 장보리, 혹은 그저 흥행하려고 만든 미스터 션샤인 같은 드라마가 비밀의 숲보다 낫다는 거냐? 완성도 측면에서 그걸 비교할 수 있느냐?”

애초에 비교 대상이 틀렸다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

작품을 만들 때에도 목적을 지닌다. 웹소설을 순문학과 비교하지 않듯이, 웹소설은 웹소설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재미를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적인 완성도를 따지면서 순문학과 비교한다면 그게 옳은 행위인가? 왜 스타벅스 조각 케익을 파인다이닝 요리와 비교하는 걸까? 그리고 사람들은 스타벅스 조각 케익을 더 쉽게 잘 평가하며 그걸 더 좋아한다.

상업 영화같은 ‘상업’이 들어간 건 항상 이런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결국 상업이라는 틀 내에서 돈을 벌려고 하는 행위이면서도 어떤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느냐가 감독의 재량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정말로 목적에 충실하게 엔터테인먼트에만 집중할 수도 있고, 반대로 어떤 작품은 목적을 무시하고 예술적인 작품을 만들려고 집중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두 종류를 구분해야 한다. 물론 이를 구분하긴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걸 엔터테인먼트로 볼 건지 예술로 볼 건지 딱 떨어지게 말하기 힘들며, 엔터테인먼트로 만든 영화라도 누군가에겐 예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받아들이는 건 관객 자신이니까. 나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 하다. 나도 어떨 때는 엔터테인먼트 영화와 예술 영화의 구분을 무시하고 동일 선에 올려두고 말한다. 그 만큼 모호한 경계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평가하려면 연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한단 거다. 어떠한 감독이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 때, 이게 얼마나 철저하게 완성했는지를 알아야만 ‘그저 운빨로 태어난 재미’인가 ‘정말로 재미가 배가 되게 연출을 했는가’ 등을 판단할 수 있으니까. 뿐만 아니라 예술 영화에서도 그러한 측면을 노려서 장치를 잘 이용했는가, 혹은 반대로 그저 스토리에 기반한 운빨인가를 알 수 있으니까. 근데 이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거고 대부분의 평론가도 못 하는 거니 넘어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터와 예술을 구분해야 하려고 해야한다 믿는다.

그리고, 연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엔터 영화를 재미라는 요소 외에는 평가할 수 없다. 그게 재밌냐 재미없냐 그 둘 뿐, 그 외의 이야기를 꺼내와도 고작 초등학생의 가시고기 책 감상 마냥 ‘슬펐어요 막 이러이러한 가족애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 한다. 비평의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감상만 쓰게 된다.

이는 영화만의 문제가 아니다(다른 분야에도 이런 문제가 있다).

 

 

이 긴 얘기를 한 이유는

날씨의 아이를 봤는데 날씨의 아이가 무난하게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날씨의 아이로 무언가를 느꼈냐하면 그건 아니다. 너의 이름은과 똑같은 작품 종류의 영화였다. 엔터 영화. 때문에 할 말은 딱히 없다. 그런데 너의 이름은과 비교하면 어떻냐는 질문을 들었는데, 애초에 엔터 영화로 무언가를 비교하기는 어려워서 할 말은 없었다.

다만 내 취향은 너의 이름은이었다. 날씨의 아이나 너의 이름은이나 둘 다 보이 밋 걸인데, 너의 이름은이 조금 더 서로 간 무언가를 해나가는 감각을 조명해줬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타키가 잘 생겼으니 미츠하가 좋아하지 라고 했는데, 이는 개소리다. 애초에 외모랑 상관없이, 연애 가능성이 존재하는 남자와 여자가 어떠한 공통된 경험을 지속해나갈 때 애정은 쌓인다. 몸이 바뀐다는 특별한 일을 겪으면서, 서로 간 장난치고 하는 그러한 행동을 해나가는 그 자체가 서로의 유대감을 끌어올리고 호감을 만드니까.

당장 여러분도 상대가 그렇게 예쁜 게 아닌데도 별로 관심도 없었는데도 어떠한 비즈니스를 해야해서 같이 영화보러 다니고 밥도 자주 같이 먹고 같이 집에서 게임하고(야쓰 안 하고) 아침에 부스스하게 일어나서 가슴 살짝 드러나는 거 보고 며칠만 해도 상대 여자에 대한 호감도가 꿈틀 거다. 그걸로 연애하게 된다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거다. 그런데 너의 이름은은 그 과정에 대한 묘사의 비중이 높았고 이 때문에 중반부터 서로를 찾아다니는 과정과 결말의 엔딩조차 아름다워질 수 있는 거다.

날씨의 아이는 “느그 이름과 비교했을 때” 그러한 부분의 묘사는 부족했다. 이 때문에 남주가 여자를 좋아하고 쫓아다니는 일이, 그저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납득되긴 해도 보는 사람이 완전히 몰입하기까지는 조금 약하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아저씨가 감정이입 하는 부분이나 누나(?)가 도와주는 부분들도 약했다. 느그이름에선 미츠하의 아빠와의 감정선도 매우 탄탄하게 잘 설명됐었고 이로 인해 “빨리 도망가게 하라거!!” 할 때도 설득력이 높았다.

다만 날씨의 아이가 느그이름보다 좋았던 점은 그거였다. 여주인공을 선택하고 세계는 포기하는, 이지선다에서 세계를 포기하고 여주인공을 선택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엄청나게 강하게 보여주는’ 거? 그 하나 만큼은 느그이름보다 좋았던 거 같다. 엔딩에서 좋았던 점도 이거였고.

 

나는 두 작품을 비교할 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비교가 크게 의미는 없다. 왜냐하면 애초에 엔터 영화로 재미만 있으면 되고 재미는 두 작품 전부 비슷하기 때문이다. 둘 다 좋다. 그 이상의 무언가는 애초에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딱 그 정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할 말이 없어서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재밌다는 감정이라는 게 재밌다 수준을 넘어가면 세세한 레벨로 재밌다를 구분하긴 어려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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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예전에 가식적으로 변하는 거 같다고 했던 적이 있다. 타인이 좋아할 내용을 쓰다보니 점점 가식적인 얘기를 하게 되는 거 같다고. 가식적(일종의 거짓)이 되는 건 문제가 있지만, 타인을 신경쓰는 자체엔 문제가 없다. 목적을 뚜렷히 인지해서 문제지 목적을 까먹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의 어린 시절을 남기고파 영상을 찍는다면 타인을 신경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제작자’라면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 작품을 만드는 거니까 결국 타인이 호응할 영상을 만들어야만 한다. 대전 게임의 목적이 ‘승리’가 최우선은 아니더라도, 게임의 목적 자체가 승리를 목적으로 플레이하게 만들어져있듯이 대전 게임은 결국 ‘승리’가 목적이고, 영상을 제작하는 사람도 결국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 제작하는 목적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신의 기록으로 남길 제작물이 아니라면 타인을 신경써야만 한다.

물론, 사람들은 이 경계에서 매우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유튜브를 기록처럼 사용한다면 굳이 공개로 영상을 올릴 필요도 없는데 굳이 영상을 공개로 올려놓고 ‘기록처럼 사용한다’곤 말한다. 결국 영상에 별다른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남이 좋아해줬으면 해서 공개로 올리는 거면서도 그런 구라를 친다. 그런 걸 진심으로 한다고 말하기는 부끄러우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다. 별풍선을 한 번 받고 싶어서 아프리카 방송을 켜도 똥꼬쑈는 하기 싫고 별풍선은 받고 싶고 이 두 가지의 경계 사이에서 자기 편한 태도만 취한다. 회사에서도 그렇다. 연봉도 많이 받고 승진도 빠르게 하고 싶지만 상사에게 친한 척도 못 하겠고 조직의 핵으로 들어갈 생각을 해야하는데 그러진 못 하겠어서 애매한 포지션으로 껴있기만 한다. 어디든 같다. 누군가에게 호감 혹은 사랑을 받고 싶어도 상대방이 원하는 선물은 돈 아까워서 못 해주겠고, 누군가에게 호감을 받고 싶지만 상대가 귀찮게 하는 걸 싫어하는데도 어떻게든 피곤하게 만들고 만다.

어떠한 행위를 할 때 그 행위 자체가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있는데도 그걸 하기싫다는 이유로 안 하는 일이 많아 ‘그렇지 않다 혼자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 결국 글을 쓰든 영상을 만들든 만화를 그리든 타인에게 보여주는 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타인의 신경을 쓰는 건 잘못된 행위가 아니며 오히려 옳은 행위다.

 

그런데 문제는 이를 자꾸 까먹게 된다. 글을 쓰다보면 ‘내 얘기’를 하고싶어진다. 이는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튜버도 그런 고충을 털어놓는 걸 본 적이 있다. 자꾸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얘기가 아니라 내 얘기를 하고 싶어진다고.

내 얘기를 하고 싶을 순 있다. 다만, 내 애기를 할 거라면 ‘타인이 좋아할 내 얘기를 잘 포장해서 타인에게 재밌게’ 해야만 하는데, 그저 ‘내 얘기’만 하고싶어진다는 게 문제다.

예를 들면 우울하다, 슬프다, 힘들다, 피곤하다 등의 이야기. 이야기의 소재가 잘못된 게 아니라, 이러한 내용을 쓸 때는 아무런 포장도 없고 그저 내가 느낀 우울한 감정과 내가 느끼는 우울한 상황만 주구장창 써내려갈 뿐이기 때문에 누가 읽어도 재미가 없고 읽고 싶어지는 내용도 아니다.

최소한 우울하다, 슬프다, 힘들다, 피곤하다 등의 얘기를 하고 싶다면 이를 최대한 잘 살려서 글로서 읽을 만한 글이 될 수 있는 최소한의 과정이라도 거쳐야하는데 대개 이러한 감정은 감정적으로 작성하고 그저 힘들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결국 우리가 친구와 술자리, 혹은 1:1로 카톡을 하는 상황, 아니면 단톡에서 얘기를 하는 상황에서조차 상대가 거부감을 가질 만한, 상대가 기피하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이 보는 장소에서 하게 된다.

 

두 영역의 경계를 자꾸만 잊고 만다. 그리고 내 얘기를 하면서 타인이 좋아해주길 바란다. 오디오 비는 스트리밍을 하면서 좋아해주길 바라는 사람처럼, 혼자 소리없이 게임하는 영상 올려두고 조회수가 늘길 바라는 사람처럼, 상대가 좋아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행동만 하고서 좋아해주길 바라는 사람처럼, 조직의 중심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팀장이랑 거리두기 잔뜩 해놓고 승진하고 인정받길 바라는 사람처럼, 자기 자식 추억 남기기 따위의 영상을 찍어두고 남이 좋아하길 바라는 사람처럼, 나도 자꾸만 어느 정도의 관심을 충족받고 싶으면서도 내 얘기에서 끝나는 내 얘기를 하려고 한다.

 

블로그가 원래 내 얘기 하는 장소인데 그게 뭐가 문제냐 라는 물음을 가졌다면 그건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한 거다. 내 얘기라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저 내 얘기로 밖에 의미를 가지지 못 하는’ 그러니까 ‘글의 목적을 잊은’ 내 얘기를 하게 된다는 게 문제다.

우리가 블로그에서 “우울하다 시팔 학교선생이랑 싸웠다”하는 글을 쓰는 블로그가 컨텐츠적인 의미로는 전혀 의미가 없듯이, 나도 자꾸만 ‘우울하다 시팔 학교선생이랑 싸웠다’라고 한 줄로만 쓰지 않았을 뿐 이와 별 다르지 않은 글을 쓴다는 거다.

학교선생이랑 왜 싸웠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고 왜 화가 났고 내가 어디서 울었고 그래서 슬펐고 그런 내용을 자세히 쓰고 최소한 글처럼 썼을 때 ‘글’이 되는 거지, 그저 글줄만 잔뜩 써놓는다고 글은 아니다.

주먹을 쥔다고 다 깡패는 아냐, 악수를 한다고 다 짝패는 아냐, 신문을 본다고 다 똥싸진 않아, MIC를 잡는다고 다 MC는 아냐. 소문이 돈다고 다 진실은 아니고, 술을 먹는다고 꼭 솔직하진 않지, 라임을 짠다고 랩이 아닐 수도 있어.

라는 힙합 가사가 있는데, 결국 마이크만 잡으면 그게 다 MC냐는 말을 하는 내용이다. 글을 쓰다보니 생각났다. MC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MC다운 음악을 해야하는데 그저 마이크만 잡는다고 MC는 아니고 라임이 있다고 다 래퍼는 아니란 거다.

나도 그렇다. 그저 내가 하고픈 얘기, 타인에게 흥미를 끌지 못 하는, 그저 술자리에서 남에게 찡찡대는 얘기를 하는 무언가를 써놓고 글로서 관심을 받길 바라는 건 틀렸다.

자꾸만 이걸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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