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반병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가 만드는 앨범을 위대한 앨범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병인데, 이게 매우 안 좋은 의미로 쓰인다. 명반에 집착할수록 음반 활동이 줄어들고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난 뒤 명반이랍시고 내놓아봐야 크게 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명곡은 투자한 시간이나 노력과 전혀 상관없이 나온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시간이나 노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분노나 어떠한 감정의 갈망이 오히려 명곡을 써낸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국 작품이라는 건(소설, 음악 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쓰는 글조차 말이다) 타인에게서의 공감(감정의 형태가 유사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타인에게 내 감정을 온전히 전해주었을 때를 공감이라고 표현한 단어다)을 이끌어냈을 때 가장 극적인 효과를 가진다.
우울한 사람이 우울한 내용의 작품을 써냈을 때 공감받기 쉽다. 우울하지 않은 사람이 우울한 척 해봐야 위화감만 생성해낼 뿐이다. 우리가 차였을 때, 차여서 너무 슬플 때, 감정으로 차인 감정에 대해 써야만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그 감정을 조금이라도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뽑아낼 수가 있다.
이런 감정을 놓치지 않고 잘 살려서 쓴 작품은, JK의 곡이 유명하다. 음반 준비 다 해놨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앨범 다 갈아엎고 냈던 앨범, 8:45 Heaven 이라는 곡이 있다. 여러분도 살면서 몇 번 들어봤을 거다.
이 때문에 예술한다는 사람을 자기 자신을 역겹다고 생각할 때도 종종 있다고 한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누군가가 죽은 때의 감정에 슬퍼하면서도 그걸 작품의 감정으로 승화시켜버리니 이게 내가 슬픔을 느끼고 있는 게 맞는 걸까? 싶어 역겨워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명반병 따위에 걸려있으면 자기 작품에 만족을 못 해서 자꾸만 수정을 하게 되는데, 수정을 하다보면 기술적으론 조금씩 나아질지언정 작품에 담긴 감정은 점점 퇴보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때의 감정은 점점 옅어지고 글을 자꾸만 바꾸다보면 그 감정이 글에서 점점 사라져버린다.
작품을 만들어내는데는 감정을 보존하기 위해 짧은 시간을 써야한다.
이는 김영하가 강연에서 했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김영하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 제한 시간을 주고 미친 듯이 독촉하면서 쓰게 만들게 한다고 그랬는데 그럴 때 좋은 글이 많이 나온다고 그랬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을 거다. 어떤 사람은 분명 시간을 많이 들였을 때 더 좋은 글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모두가 다 똑같은 행동으로 뽑아낸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대체적으로 그런 고민을 하지 않고 손 가는 대로 썼을 때, 작품의 퀄리티는 조금 떨어진다한들 감정은 온전히 보전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감정을 조금만 다듬기만 하면 되는 글이 나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평소에 글을 쓰고 연습하는 행위로 나중에 수정을 덜 해도 되는, 감정을 최대한 예쁘게 담아내서 나중에 감정이 잘 보이게 화석 발굴하듯이 흙에서 꺼낼 때도 손이 덜 가게 해야하고.
그런데 이런 문제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명반병에 집착하면 자기가 불만족을 해서 자꾸만 수정하고 갈아엎다보니 작품 자체도 안 나온다. 작품이 있어야 창작자도 존재하는 건데 작품을 내지 않고 다듬기만 하고 있으니 아무리 시간을 들여봐야 의미가 없다.
솔직히 명반을 만들어내는 건 어느 정도의 운빨도 있다. 일단 기본적으로 실력이 뒷받침되어준다고 할 때 일단 많이 만들어내면 그 중에 하나는 대박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자기가 작품을 내질 않으니 혼자서 레고질 하듯이 다듬고만 있으니 좋은 작품이 나올 확률도 점점 떨어진다.
하스스톤에는 예전에 그런 말이 있었다. 승수로 밀어붙여라. 하스스톤의 구조상 승률이 50%만 초과하면 판수로 밀어붙이면 어떻게든 전설은 찍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승률이 너무 작게 차이나면 현실적으로 시간을 들일 수 없는 판수가 필요하니 불가능하긴 한데, 여하튼 별 25개(25승)만 얻으면 전설을 찍을 수 있을 수 있던 때가 있었다.
50판을 해서 +25로 승급하려면 엄청 빡세지만, 2000판을 해서 +25하는 건 어렵지 않다. 반반 승률보다 조금만 높으면 된다. 프로게이머는 80% 승률로 금새 전설 달아버리지만, 나는 실력이 안 되니 2000판을 해서 52% 승률로 전설을 찍으면 된다.
이처럼 작품을 일단 꾸준히 내면 그 중에 하나는 얻어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도 내지 않으면 얻어걸리는 일조차 없다.
로또를 맞고 싶으면 일단은 로또를 질러야 한다. 로또를 안 지르면 아예 로또를 맞을 확률이 제로다. 하지만 로또를 하나라도 지르면 제로에 가깝지만 제로는 아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당첨될 세계선을 늘리고 싶으면 꾸준히 질러야 한다.
(물론 로또는 당첨 확률이 너무 낮고 오히려 내가 얻게 될 돈보다 쓰게 될 돈이 많기 때문에 안 하는 게 이득이지만, 단순히 가볍게 제로인 확률을 제로는 아니게 만든다 정도로 지르는 건 솔직히 그렇게 멍청한 행동이 나는 아니다)
그런데 로또는 확률게임이기라도 하지 작품은 정말 대충 지껄였을 뿐인데도 누군가가 좋아해줄 수도 있다.
명반병은 독이다.
가볍게라도 꾸준히 쓰는 사람이 좋은 결과를 얻기 쉽다.